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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선 목사가 이단시하는 바로의 영과 노예의 영에 대한 답
  • 기사등록 2024-12-07 18:30:49
  • 기사수정 2025-05-17 14: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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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선 목사는 세계로선민교회 고희인 사모의 강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고 사모목사는 최근 2,3년 동안 목회자 성경세미나에서의 집중 강의 주제가 남편에게는 ‘바로의 영’, 아내에게는 ‘노예의 영’이 있다면서 노예의 영이 있는 아내들은 남편에게 계속 말해야 만이 노예의 영을 쫓아내고 바로의 영을 꺾을 수 있다고 강의했다. 이런 비성경적 가르침으로 고사모에게 강의를 듣거나 코칭 받는 목회자나 가정들에게서 불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흥선 목사가 운영하는 1인 인터넷 방송인 기독교 방송 cbntv.tv.)

 

이흥선 목사는 '바로의 영'과 '노예의 영'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다는 것이 비성경적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단성이 있다고 공격했다. 

 

이흥선 목사의 이 기사내용에 대한 답을 밝힌다.

 


1. '바로의 영'과 '노예의 영'은 ‘압제하는 자’, ‘압제당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흥선 목사가 자신의 글에서 "최근 2,3년 동안 언급한 바와 같이"라고 말한 것처럼 고희인 사모가 ‘바로의 영’과 ‘노예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최근 2,3년 전부터로서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 20년 가까이는 거의 대부분 ‘압제하는 자, 억압하는 자’와 ‘압제당하는 자, 억압당하는 자’로 표현해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청중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성경에 있는 ‘바로’와 ‘노예’라는 표현을 가져와 상징적으로 사용했다. ‘압제하는 자’보다 ‘바로의 영’이 훨씬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희인 사모의 세미나 녹취본을 보면 ‘바로의 영, 노예의 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훨씬 전에 ‘억압’과 ‘압제’로 표현해왔음을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2014.4.14.일 강의

(고희인 사모가 남편인 김현두 목사를 많이 압제했다고 말하면서) 내가 힘들고 무겁다고 생각한 만큼 우리 목사님의 영을 내가 '압제'('최근에 '바로의 영'으로 표현)한 것이다.~~나만 무겁고 나만 힘든 줄 알았더니 내가 어마어마하게 '압제'를 해서 우리 목사님이 내 눈치를 보고 살았다. 난 내가 눈치 보고 산 줄 알았어요.~~보이지 않는 영으로 '압제'를 해서 둘이 똑같이 무거웠더라구요. 

 

2013.4.8.일 강의

우리들(목회자들)이 피가 가득한 대화를 하고, 또 그런 삶을 살면서 '압제의 고통의 영'(최근에 '바로의 영'으로 표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2016.11.21.일 강의

다른 사람들을 '억압'(최근에 '바로의 영'으로 표현)하느냐? 상전(최근에 '바로의 영'으로 표현)의 자리에 있느냐? 종(최근에 '노예의 영'으로 표현)의 자리에 있느냐? 차이입니다. 

 

녹취본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고희인 사모는 십여년 전부터 최근까지 ‘압제’나 ‘억압’이라고 표현해왔다. 이것을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바로의 영'과 '노예의 영'으로 표현을 달리했을 뿐, 그 본질은 같다.

 


2. 바로의 영과 노예의 영은 이해를 돕기 위한 상징 표현으로서 실제 영을 말하지 않는다. 


고희인 사모는 바로의 영은 상징 표현으로서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로는 애굽시대 사람으로서 옛날에 죽었다. 그래서 지금 바로의 영은 여기에 있을 수 없다. 사람은 한번 죽으면 영원히 올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의 아주 기초이다. 내가 바로의 영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는 영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압제하면 부부연합이 흐트러져 올바른 영적 신앙생활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리얼하게 인식하기 위해 "압제하는 자"를 "바로의 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로의 영"은 실제 "영"이 아니라 "압제하는 자'를 영적,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3. 오해를 막기 위해 바로의 영과 노예의 영을 '압제하는 형', '압제당하는 형'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 

 

고희인 사모는 오해를 막기 위해 바로의 영을 '압제하는 형', 노예의 영을 '압제당하는 형'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로의 영과 노예의 영 표현에 대해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성경지식이 많기 때문에 애굽시대의 바로의 영이 실제 지금 살아서 사람 속에 역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수라도 실제 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므로 바로의 영을 '압제하는 형', 노예의 영을 '압제 당하는 형'으로 표현해주는 게 좋다." 

 


4. 압제하는 형(바로 형)과 압제당하는 형(노예 형)은 남자와 여자가 같다.


이흥선 목사는 자신이 운영하는 1인 인터넷 방송인 기독교 방송(cbntv.tv)에 다음과 같이 게재했다. 

 

"고 사모 목사는 최근 몇 년간 목회자 세미나에서 강의하면서 남편 목사들에게는 바로의 영이 있으며 사모들에게는 노예의 영이 있다고 수차 강의했다. 1000/1 정도만 사모가 바로이고, 1000/999는 목사가 바로이다(2023.4.3)고 강의했다. 성경에 없는 주장이다."

“고 사모목사는 남편에게는 ‘바로의 영’, 아내에게는 ‘노예의 영’이 있다면서 노예의 영이 있는 아내들은 남편에게 계속 말해야 만이 노예의 영을 쫓아내고 바로의 영을 꺾을 수 있다고 강의했다. 이런 비성경적 가르침으로 고사모에게 강의를 듣거나 코칭 받는 목회자나 가정들에게서 불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

 

위 기사에서 이흥선 목사는 “목사님들의 999/1000이 바로이며 1/1000 정도만 사모님들이 바로”라고 강의했다면서 "남편은 바로, 아내는 노예" 구도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게 몰아가는 이유는 남자와 목사님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세계로선민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훼손하려는 게 아닌가 추측된다.  

 

위 내용은 이흥선 목사가 의도적으로 강의의 일부분만 발췌해 왜곡되게 한 것이다. 


고희인 사모는 목사님들을 중심으로 강의할 때는 목사님들이 바로라고 강조하고, 사모님들을 중심으로 할 때는 사모님들이 바로라고 강의했다. 남녀 간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남녀 불문하고 부부 사이에 서로 압제하는 것을 고쳐야 함을 주제로 했다. 

 

그 증거로 고희인 사모는 여자인 자신을 남편을 압제한 바로로 소개했다. 앞서 소개했는데 다시 살펴본다. 

 

2014.4.14.일 강의

(고희인 사모가 남편인 김현두 목사를 많이 압제했다고 말하면서) "내가 힘들고 무겁다고 생각한 만큼 우리 목사님의 영을 내가 '압제'(최근에 '바로'로 표현)한 것이다.~~내가 어마어마하게 '압제'를 해서 우리 목사님이 내 눈치를 보고 살았다. 난 내가 눈치 보고 산 줄 알았어요.~~보이지 않는 영으로 '압제'를 해서 둘이 똑같이 무거웠더라구요." 

 

이렇게 여자인 자신이 압제하는 바로로 말했다. 남녀를 가르지 않고 바로가 될 수 있다고 강의했다. 

 

고희인 사모는 늘 남녀는 차이가 없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사모들도 바로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남편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요. 다 똑같아요. 부부는 셋트에요. 여자라고 해서 다 노예가 아니예요. 여자가 남편을 짓누르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그러면 남편 목사님들이 어떻게 어깨를 펴고 목회를 하겠어요. 사모들이 목회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럴 때는 눌린 목사님들이 사모들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사모들의 바로가 끝날 때까지 용기를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사모들은 말을 하지 말고 목사님의 말을 성령의 음성으로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사모의 바로가 끝나고 목회가 열립니다." 

 

결론으로 고희인 사모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상대를 압제하는 것을 그칠 때 부부화목을 이룰 수 있다고 강의했다. 

 


5. 고희인 사모의 가르침을 받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상황 


1) 세계로선민교회 교인들의 가정 

 

이흥선 목사는 고희인 사모의 가르침을 받은 세계로선민교회 교인들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사를 썼다. 

 

“그런가 하면 고사모에게서 바로의 영, 노예의 영으로 세뇌된 선민교회 교인들로 인해 외부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멀쩡한 가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는 등 심각한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다. 

이런 비성경적 사상에 세뇌된 성도들로 인하여 섬기는 교회(타교회)를 등지게 하고 부부의 대의를 깨는 것은 물론 인륜(人倫) 마저 저버리게 한다. 이단 사이비들에게서나 볼 듯한 심각한 부작용이 세계로선민교회에게서 보여지고 있다.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도 이러지 않는다.” (cbntv에 올라온 “세계로선민교회 고희인 사모목사 비성경적 직통계시 넘쳐”) 

 

위에서 이흥선 목사가 고희인 사모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가정이 파탄 직전에 있고, 인륜(人倫) 마저 저버리게 한다."고 예를 든 가정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의 가정이다. 자신의 아들 가정임을 숨기고 마치 다른 가정인 것처럼 쓰고 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빚어진 가정 문제를 고희인 사모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계로선민교회 전체가 가정 파탄이 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세계로선민교회는 수년 전 성전을 이전하기 전에는 400여 명이던 교인 수가 지금은 코로나 기간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1,000여 명 가까이 되는 중형교회로 성장했다. 현재 세계로선민교회 성도들은 매일 자원해서 전도하고, 월요일마다 열리는 세미나와 화요일에 열리는 신학교 강의에 참석하는 학생들을 위해 식사 봉사를 섬기고 있다. 이런 성도들의 자발적인 헌신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리고 세계로선민교회 근처에 있는 가게나 음식점, 학교 등도 세계로선민교회가 이사 온 후로 이 지역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정말 살아있는 교회, 정결하고 깨끗한 교회,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거룩한 성도들이 모인 모범적이고 성경적인 교회라는 증거다. 

 

이처럼 교회가 이전한 지 3년여 만에 3배 가까운 부흥을 이루고, 지역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며, 매주 계속해서 그 지역의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교회로 올라오고 있다면 너무나 건강한 교회가 아니겠는가? “멀쩡한 교인들이 파탄에 이르는 교회”라는 이흥선 목사의 말이 너무 괴리감을 주는 말로 들린다. 

 

2) 목회자 가정들 

 

이흥선 목사는 고희인 사모의 가르침을 받은 결과에 대해 “이런 비성경적 가르침으로 고사모에게 강의를 듣거나 코칭 받는 목회자나 가정들에게서 불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기사를 썼다. 

 

이 말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고희인 사모로부터 현재 강의를 듣거나 코칭 받는 목회자는 전국에 200여 명으로, 현재 세미나를 듣기 위해 경상도에서, 충청도에서 매주 올라오는 부부들도 있다. 전라도에서도 유튜브를 통해 세미나를 듣고 있다. 

 

그리고 세미나를 시작한 것이 2009년인데, 그 당시에 20여 부부가 참여했었다. 그 후 세미나를 아무런 광고나 홍보 없이 지속해 왔는데 현재 200여 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흥선 목사의 말대로 고희인 사모의 가르침을 받은 후 가정의 불화가 일어났다면, 이런 양적 부흥이 과연 일어났겠는가? 있던 사람도 떨어져 나가 세미나에 아무도 없어야 정상 아니겠는가? 

 

오히려 현재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바로의 영과 노예의 영에 대한 세미나를 들으며 부부 연합과 가정 회복에 어마어마한 진보를 보이고 있다. 

 

단적인 예로, 지금도 세미나에 참여하는 목회자의 자녀들이 세계로선민교회에서 운영하는 목회자 자녀 모임에 20여 명이 넘게 참여하고 있다. 세계로선민교회의 가르침을 받은 결과 부모가 변하고, 또 자녀가 변한다고 좋아하면서 주일 오후에 지방에서도 차를 태워주면서 보내는 것이다. 

 

이런 명명백백한 행복과 회복의 열매가 가득한데, 고희인 사모의 강의를 듣고 가르침을 받은 가정에 불화가 생겼다는 말은 어떤 근거에서 한 말인지 궁금하다. 유익이 되기는커녕, 해가 되는 세미나에 먼 거리에서 달려오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3) 이흥선 목사가 사례로 든 목사 부부(1) 

 

이흥선 목사가 사례로 든 예이다.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 모 목사는 방학동안에 지역별로 소그룹을 갖고 있는데 소그룹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참석하면 바로 영 빼고 노예 영 뺀다고 맨 날 부부싸움이나 한 얘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부부싸움 얘기 들으러 먼 길까지 가서 참석하느냐며 말했다.” (cbntv에 올라온 “김현두, 고희인 부부목사의 비성경적 행태들을 진단한다(1)”) 

 

이흥선 목사가 사례로 든 이 목사 부부는 2016년에서 2018년경에 세미나에 참석했던 부부로, 이분들은 연세도 많고 지금은 은퇴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소그룹 모임을 몇 번 참석하고 그만둔 분들이다. 

 

그런데 이분들이 다닐 때는 고희인 사모가 바로의 영, 노예의 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때다. 그때는 압제하는 자와 압제당하는 자로 표현할 때다. 이흥선 목사가 기고한 대로 고희인 사모가 바로의 영, 노예의 영을 처음 강의한 것은 2023년으로, 이분들이 바로의 영, 노예의 영을 운운하며 싸웠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이흥선 목사는 스스로 이 사람들이 듣지도 못하고, 또 하지도 않은 말을 자의적으로 붙여서 거짓말한 것이다. 

 

만일 그분들이 부부싸움을 하셨다면 서로 압제하는 단점을 버리는 훈련 중에 하셨을 것이다. 자기의 압제 단점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부부싸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분들도 열심히 해보려 한 것이지 잘못은 아니다. 이흥선 목사의 기사는 이런 식으로, 겉으로 볼 때는 이 말 저 말 갖다가 붙여 놓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과 다른 게 너무 많다. 

 

4) 이흥선 목사가 사례로 든 목사 부부(2) 

 

다음은 이흥선 목사가 기고한 글의 내용이다. 

 

“이같은 고 사모의 가르침으로 인해 강의를 듣던 김포의 한 모 교회는 풍지박산이 났다는 것이다. 일산에서 목회를 하다가 김포로 옮겨 약 200여명의 성도까지 부흥되고 있었는데 고 사모의 강의를 들은 후 그 목사의 사모가 허구헌날 자신의 노예 영을 빼고, 남편 목사의 바로 영을 빼기 위해서는 말을 해야 한다면서 사사건건 참견하고 말을 해 너무 잦은 부부싸움을 성도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200여명의 교인들이 거의 다 떨어지는 등 교회가 풍지박산이 났다는 것이다. 그 후 그 사모는 교회가 망가지고 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더 이상 세미나에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서 교회가 점점 다시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cbntv에 올라온 “김현두, 고희인 부부목사의 비성경적 행태들을 진단한다(1)”) 

 

이흥선 목사의 말대로 “강의를 듣던 김포의 한 모 교회”라고 한다면 고희인 사모의 가르침을 일정 기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르친 고희인 사모도 모르고, 함께 세미나를 들은 200여 명의 목회자들 중에서도 이 부부를 아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 강의 때문에 200여명이 거의 떨어졌다고 했는데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만일 200여 명이 다 떨어진 게 사실이라면 그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게 틀림없다. 그 이유를 드러내기가 곤란해 세미나 때문이라고 둘러대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부부가 목회를 더 잘 하기 위해 서로의 단점을 고치려다 200명이 다 떨어지는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이 부부가 세미나에 왔었다면 이흥선 목사는 실명을 밝히기를 바란다.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한다면, 이흥선 목사는 아무 증거가 없는 거짓을 이야기한 것임이 명백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흥선 목사가 기고한 세미나를 듣는 목회자 가정의 불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6. '바로'와 '노예'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 

 

그렇다면 왜 억압하는 자를 ‘바로’로, 억압당하는 자를 ‘노예’로 설명한 것이 성경적일 수 있는가? 이는 성경에서 ‘바로’와 ‘노예’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바로를 ‘억압의 상징’으로, 노예를 ‘억압당하는 자의 상징’으로 설명하는데, 이런 해석은 전 세계의 수많은 석학들에게서 너무나 쉽고 방대하게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출애굽 기사의 주요 줄거리를 이스라엘이 '바로에게 억압당하다가' 해방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 정옥배 외, IVP, 2006, pp.115-116).


또 새성경사전은 ‘바로’를 설명할 때 ‘이스라엘이 억압받을 때의 바로’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새성경사전』, 나용화, 김의원, CLC, p.570).


류관석 교수는 ‘억압의 상징 애굽, 애굽 땅에서 겪었던 압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류관석,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CLC, 2021, p.133). 류관석 교수는 '바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애굽을 억압의 상징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애굽에서 신으로 추앙되던 바로 역시 억압하는 자라는 의미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또 성경신학 스터디 바이블은 출애굽기 1장 8절을 주석할 때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압제를 부추긴 이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여기서 ‘이 왕’이 바로 바로를 가리킨다. (D. A. 카슨 외, 『성경신학 스터디 바이블』, 박세혁 외, 복 있는 사람, 2021, p.142).


세계적인 성경신학자 빅터 P. 해밀턴은 자신의 출애굽기 주석에서 출애굽기 1:12의 ‘학대’를 주석할 때 ‘어떤 이를 강제로 복종하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주석하고, 특히 사라가 하갈을 ‘학대’한 것을 애굽의 바로가 사라의 후손에게 행할 것이라고 주석한다. 그러면서 해밀턴은 하갈을 억압하는 사라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바로를 예기한다고까지 주석한다. (빅터 P. 해밀턴, 『출애굽기』, 박영호, 솔로몬, 2017, pp.51-52).

 

이 부분에서 특별히 주목할 학자는 마이클 모랄레스인데, 모랄레스는 자신의 저서 『출애굽 성경신학』에서 이 부분을 아주 정확히 짚어준다. 모랄레스는 혹독한 애굽의 노예 생활은 죄의 압제였다고 말하며 (마이클 모랄레스, 『출애굽 성경신학』, 윤석인, 부흥과개혁사, 2021, p.20), 이스라엘은 바로에게 지배받는 노예 상태였다고 정확하게 언급한다. (마이클 모랄레스, 위의 책, p.69). 모랄레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신약에서 예수님이 성취한 새 출애굽으로 연결하는데, 예수님이 이룬 새 출애굽은 “죄에 대한 예속과 사탄의 지배에서부터 구속받는 것(롬6, 갈4)”이라고 저술한다. (마이클 모랄레스, 위의 책, p.70).


이를 정리한다면 이스라엘의 노예 상태는 죄와 사탄의 상징인 바로에게 압제당하고 지배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할 때 “바로”는 “억압하는 자, 압제하는 자”의 상징이며, 반대로 “노예”는 “억압당하는 자, 압제당하는 자”의 상징이라는 것이 얼마나 성경적인 주장인지를 알 수 있다. 

 


 

결론 

 

이처럼 ‘바로’와 ‘노예’는 분명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고희인 사모는 시대 상황을 꿰뚫는 눈을 가지고 성경적 진리를 목회자들에게 제시한다. 이것이 분명한 성경적 진리이기에 200여 명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회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 교회는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으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루어 가고 있다. 

 

 

참고문헌

류관석,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CLC, 2021.

마이클 모랄레스, 『출애굽 성경신학』, 윤석인, 부흥과개혁사, 2021.

빅터 P. 해밀턴, 『출애굽기』, 박영호, 솔로몬, 2017.

스콧 듀발 외, 『베이커 성경배경주석』, 김창영, 생명의말씀사, 2022.

크레이그 맬킨, 『나르시시즘 다시 생각하기』, 이은진, 푸른숲, 2017.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 정옥배 외, IVP, 2006.

D. A. 카슨 외, 『성경신학 스터디 바이블』, 박세혁 외, 복 있는 사람, 2021.

새성경사전』, 나용화, 김의원, CLC.

양현아, "2005년 3월, 민법 개정안이 의결되어 호주 관련 제도가 사라진 법 · 제도 개정."


이 글은 한 개인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공익을 위함임을 밝혀둔다


기독교연합방송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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